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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독립운동가‘위창 오세창’수집 ' 근묵 槿墨' 국가 문화재 지정 신청

이순신 글씨만 제외하고 고려말~근대기 한반도 1,136명의 명사 글씨가 총망라

서울시는 한반도 600년의 기간 동안 1,136명의 유명 인물들이 남긴 글씨를 모은 국내 최대 규모의 서첩(書帖), 『근묵(槿墨)』을 국가 문화재로 지정 신청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으로, 모두 34첩의 서첩과 1책의 목록집으로 구성되었다. 비단으로 된 표지에 전서(篆書) 글씨로 ‘槿墨’, ‘八十葦’이라고 쓰고 ‘위창한묵(葦蒼翰墨)’ 의 위창 오세창(吳世昌) 인장이 찍혀 있어 그의 나이 80세인 1943년에 묶은 서첩임을 알 수 있다.

포은 정몽주부터 근대기 서화가 이도영(李道榮)의 진적(眞蹟)까지, 오직 이순신 1명을 제외한 고려 말에서 한반도 근대기에 이르는 유명 인물들의 행서 · 초서 · 해서 · 전서 · 예서 등의 글씨체가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필적(筆跡)은 서간(書簡) 724점, 시(詩) 359점, 제액(題額) 15점, 기(記) 10점, 부(賦) 7점, 서(序) 5점, 화제(畵題) 3점, 증언(證言) 2점, 비명(碑銘) 2점, 발(跋)2점, 찬(贊) 1점, 잠언(箴言) 1점, 법어(法語) 1점, 표제(表題) 1점, 유지(諭旨) 1점, 물목(物目) 1점, 종명(鐘銘) 1점 등으로, 서간과 시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근묵』을 집성한 위창 오세창은 일제강점기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계몽운동가 · 문예애호가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런 오세창의 신념과 정신, 감식안(鑑識眼)이 고스란히 담긴『근묵』은 국내 서예사의 명실상부한 귀중본이다.

서화 감식에 탁월한 안목을 가진 오세창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문화재 수집가 ‘간송 전형필’이 서화와 공예품 수집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영향 을 끼친 인물로, 전형필의 수집활동에 늘 감정과 평가를 했던 스승이었다.

근대를 대표하는 문화재 감식가로서, 오랜기간 동안 오세창이 동분서주하며 구입 · 수집한 서예 작품들이 수록된『근묵』은 한국 서예사의 기준작이자 조선시대 글씨 변화의 흐름과 수준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정신이 담긴 문화재를 스스로 지키려 했던 위창 오세창의 큰 뜻이 방대한 분량의 실물로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데『근묵』의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서첩에 수록된 필적(筆跡)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국왕부터 사대부 · 중인 · 노비 · 승려 등 다양한 계층들의 사회상과 생활사를 알 수 있고, 일제강점기에 절개가 뛰어났던 인물들의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으며, 한반도 600여 년간의 인물들에 대한 인명사전적 역할을 하며 다방면의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조선시대 국왕 ‘정조’가 창덕궁 후원의 상림(上林)에 담배를 재배한 것을 친척에게 자랑하며 하사한 물품 목록과 아내를 잃은 지인에게 마음을 안정시키고 슬픔을 삭이는 비법을 알려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편지, 조선시대 전별연(餞別宴)에서 주고받은 송별시나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연작시 등 다양한 주제가 담겨 있다.

또한, 고종의 특사로 1907년 헤이그에 가서 순절했던 ‘이준(李儁)’의 시고에 ‘천고에 추앙받으리란 찬사’를 담은 추도사를 덧붙이기도 했던 오세창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글씨들을 남긴 인물들은 대부분 절개가 빼어난 사람들을 위주로 편집하였다.

특징적인 것은 각 서간마다 글씨를 쓴 주요 인물명(자, 호), 이력(관향, 시대, 계통) 및 생몰년 등이 목록에 작성되어 있어 글씨를 남긴 인물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역대 명사들의 인명사전적 역할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만,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근묵』가운데 일부는 비교대상본이 없어 진위판단이 어려운 작품도 전하며, 1943년에 성첩되었다는 시기를 두고 국가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신청 방향에 대해 오랜 기간 논의와 검토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최다의 명사 글씨가 총망라된『근묵』이 국가문화재로서 충분한 지정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하였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이개(李塏) 등 고려와 조선초기 작가의 몇 작품의 진위여부, 서명은 있으나 필법이 후대인 경우, 생존기간과 간지가 일치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경우 등 필자와 서풍, 작품의 실제 작가 등이 서로 상충한 것이 있다. 그리고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안평대군(安平大君), 김수온(金守溫) 등의 작품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위작(僞作)보다 진작(眞作)이 다수를 차지하며, 우리나라 서예사의 귀중본이자 역대 최대 분량의 서첩인 본 문화재가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와 상징성을 보다 많은 국민에게 알리고, 지속적으로 보존 · 관리되어 후세에 보전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단『근묵』뿐만 아니라 오세창과 그의 집안이 수집 · 제작한 많은 문화재들은 오세창이 3.1 독립운동으로 3년 간 옥고를 치룬 후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씩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다.

오세창은 선조로부터 전승된 유물을 모아『근역서휘(槿域書彙)』를 1911년 성첩하였는데, 3.1 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3년간 투옥되고 1923년 석방된 이후 이를 박영철에게 양도하였고 경성제국대학교에 기증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후 집안의 중국 명품 서화를 매도하고 그 대가로 조선의 서화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하게 된 오세창. 그가 남긴 문화재는 조선시대 회화 총67점이 실린『근역화휘(槿域畵彙)』, 조선초기부터 광복 이전까지의 서화가와 학자들의 인장을 모아 엮은 인보『근역인수(槿域印藪)』,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사서(辭書)인『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으로 전한다.

안타깝게도 1953년 한국전쟁 피난지인 대구에서 오세창이 작고한 이후, 유족들에 의해『근역인수』는 국회도서관,『근역화휘』는 박영철을 거쳐 서울대학교,『근묵』은 성균관대학교에 양도되었다.

현재, 일제강점기 동안 절개를 지키고 변절하지 않은 민족지도자 ‘오세창’이 남긴 문화재들은 단 한점도 문화재로 지정(등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문화재 수집은 ‘나라 잃은 민족의 역사와 문화, 혼을 지키려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서울시가 국가문화재로 지정 신청한『근묵』을 시작으로, 위창 오세창의 숭고한 의지와 곧은 기개를 담은 문화재들이 국가 혹은 지자체 문화재로 지정(등록)되어 그 가치가 널리 알려지길 기대한다.

[보도자료출처: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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